용서마을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용서마을

콘텐츠

HOME > 마을소개 > 마을역사

마을역사

태인군 용산면 구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화호리, 정자리, 신덕리 일부를 병합하여 화호리라하고 용산면에 편입되고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호리는 속칭 숙구지(宿驅地-宿狗地)라 불리우는 곳으로 면 행정의 중심지로 면사무소가 있었으나 호남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면사무소는 신태인으로 옮겨 지게 되었다. 특히, 이곳은 옛날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로 가는 “나루터”가 있었다. 지금은 나루터의 흔적을 찾아 볼수 없으나 한때는 인근 고잔까지 젓배가 드나들었으며 이곳을 통해 군산으로 쌀이 반출되기도 하였다.


이 곳 화호리는 정읍에서 일본사람들이 특히, 일본 토지부호들이 가장 많이 살던 지역으로 “구마모또(熊本)”라는 만석꾼이 이곳에 와서 지형을 살펴보고 풍수자리로 개가 입을 웅크리고 있는 지점에 창고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농촌위생연구소로 발족된 웅본농장의 부속병원이 광복후에 “화호병원”이 되었다.


일본 사람이 많이 살아서 그들의 “소학교”가 있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그 자리에 화호 용산국민학교가 개교 되었고, 화호여자중학교가 생겨나 배구 운동을 잘하여 유명하며 전국을 석권하기도 하였으며, 지금을 인상고등학교의 전신이다. 또한 이곳은 조선시대 “감자”가 생산되어 임금에게 진상하였다는 구전이 있어 지금도 남을 비방하거나 욕지거리를 할 때 “봉지터진 숙구지 감자나 먹어라”라는 말이 있으며, 북한에서도 정읍은 몰라도 숙구지라고 하면 알정도로 유명한 곳이라 한다.


● 숙구지 이야기

숙구지

화호리는 조선시대부터 '숙구지 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숙구지'라는 명칭은 마을의 지형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 마을은 자고 있는 개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지명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조선말 한 도사가 이 마을을 지나면서 마을의 지형이 마치 개가 자고 있는 형상과 같다고 하여 '숙구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개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는 형상이니 사람들이 살기에도 좋은 곳이란 뜻을 갖고 있다." 마을의 원로들은 "개는 주둥아리가 따숴야 자. 이 숙구지는 개가 자는 형상인게 구마모토가 창고를 지을 적에 따뜻한 개 주둥아리 자리에다 지은 거여."라고 힘주어 말한다.
마을의 명당을 구마모토가 차지했다는 것인데, 구마모토가 실제로 숙구지 설화를 인식해서 '명당'에 집을 지었는지 그 진위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의 가옥과 농장 사택, 창고 등이 들어선 자리가 바로 '개의 주둥아리에 해당하는 곳' 즉 '마을의 명당'이었다는 점을 주민들은 힘주어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믿어온 숙구지 이야기에는 '마을의 명당을 일본인에게 빼앗겼다는 분노''빼앗길 만큼 이 마을 터가 좋다는 자부심' 이 두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
한편 숙구지의 '구지'가 '곶이'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과거 화호는 동진강 물줄기가 지나던 곳으로 나루터에서 배가 드나들었고, 곶이의 형태가 지금도 남아 있다. 따라서 일부 전문가들은 이 같은 주장도 타당하다고 여긴다.


  • 신태인읍
  • 화호리
  • 화호리 각 마을
  • 신태인읍 유래 및 역사

    신태인은 백제시대에는 인의현으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태산군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서 태인군 등의 명칭으로 불려오다가, 1914년 3월 1일에는 용산면(龍山面)과 북촌면(北村面)을 합하여 용북면(龍北面)으로 개편되었다.


    1912년 호남선이 개통되고, 1914년 1월 11일에 김제와 정읍 구간이 개설되자 때를 같이하여 신태인역이 문을 열었다. 신태인이라는 지명은 원래 고을이 있었던 태인과 구별하기 위해서 신(新)자를 붙인 것이다. 1933년 용북면은 신태인 면으로 개칭하고, 1940년 11월 1일 신태인읍으로 승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태인역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급격한 발달을 하게 되는데, 1960년대 초에는 인구가 25,00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쇠락을 거듭하며 현재는 3,400여 가구에 8,700여 명이 거주하는 소도읍이 되었다.


    신태인읍

  • 화호리 유래 및 역사

    화호리(禾湖里) 화호(和湖)라는 지명은 주변 김제시 부량면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삼한시대 저수지인 벽골제(벼고을의 의미)와 관련된 지명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화호리, 정자리, 신덕리 일부가 병합되어 화호리라 하고, 용산면에 편입되었으며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4년 신태인에 역이 세워지고 역을 중심으로 한 소도시가 발달하기 전에는 화호리가 이 일대의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특히, 이곳은 옛날 부안군 백산면(白山面) 원천리(元川里)로 가는 “나루터”가 있었다. 지금은 나루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한때는 인근 고잔(古棧: 백산 앞쪽마을로 동진강 하류지역, 원래는 곶안으로 해안지역의 지명임)까지 젓배가 드나들었으며 이곳을 통해 군산으로 쌀이 반출되기도 하였다.


    화호리는 ‘숙구지 마을’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숙구지(宿拘地)’라는 명칭이 생기게 된 유래를 마을 어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말 한 도사가 이 마을을 지나면서 마을의 지형이 마치 개가 자고 있는 형상과 같다고 이 같은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개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는 형상이니 사람들이 살기에도 좋은 곳이란 뜻이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알고 있으나, 실은 이 ‘구지’가 ‘곶이’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이 마을은 주변에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먹을 것이 풍부하고, 정읍, 김제, 부안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여서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육로뿐만 아니라 동진강가의 나루터가 있어서 수상로를 이용하여 물산의 교류도 활발한 곳이었다.

    화호리

  • 화호리 각 마을 유래 및 역사

    화호리 각 마을

    - 포룡(抱龍) 마을

    포룡마을은 숙구지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성냥댕」이라고 하였으며 이곳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포룡마을은 용이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이렇게도 부른다고 한다.

    - 용교(龍橋)마을

    용교마을은 예전에 숙구지 장터라 하여 마을 앞에 장터가 있어 그곳에 닷세마다 장이 섰다고 한다.
    지역주민들 구술에 의하면 화호장 또는 숙구지 5일장 터는 포룡마을에 있었다. 구술내용이 약간씩 차이가 난다. 화호보건진료소 자리가 예전에는 장터 입구였다고 말하는 지역주민이 있는가 하면 현재 화호교회 앞에 자리 잡은 농협 창고가 예전의 숙구지 5일장 터였다고 말하는 지역주민들도 있었다.

    - 용서(龍瑞)마을

    용서마을의 뜻은 용 용(龍)+상서로울 서(瑞)로, 이 마을은 당산나무 언덕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일제시기 구마모토는 이 마을에 농장 사무실을 비롯한 사택촌을 조성했는데, 이 사택촌들이 현재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해방 이후 한때 이곳에 화호병원이 들어서기도 했었다.

    - 정자(亭子)마을

    정자마을은 1794년 정조 18년인 갑인(甲寅)에 승지(承旨)를 지낸 바 있는 반포재(伴圃齎) 이면(李勉)이 벼슬에서 물러나와 이곳에서 정자를 짓고 낙유재(樂有齎)라 하여 후진을 교육하였다.
    후손들이 그 유적을 보존하기 위하여 1914년인 갑인(甲寅)에 다시 지었으나 지금은 헐어지고 없다. 이 마을은 전주 이씨가 많이 살고 있는 큰 동네가 있고,「새터」와「안 끝」이 있다. 신태인읍은 모두 11개리에 48개 마을이다.


카피라이터

LOGIN
ID저장